Multi Culture

유치원때부터 나의 꿈은 화가였다.​

오래전  공군 장교 생활을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났었다. 막연하게 한국의 미술교육시스템이 싫어서 외국에서 미술을 배우고 순수미술을 해보겠다는 목표로 미국,프랑스 그리고 캐나다를 놓고 1년 넘게 갈등을 하다가 캐나다 달러가 그 당시 미국 달러보다 훨씬 낮다는 이유로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 나이가 벌써 한국 나이로 삽심이 넘어서였다.

처음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는 첫날의 깜깜했던 밤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였는지, 캐나다의 아름다운 주변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어느 순간 길을 걷는데 동네 곳곳마다 형형색색의 예쁜 꽃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었다. 아무런 색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었다. 

한국에서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나로선 무모한 도전이었다. 막상 다음날부터 큰 벽이 다가옴을 느꼈다.학창시절 영어보다는 수학점수가 두 배가 높았던 과거가 후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길을 나서면 밀려오는 영어의 압박감이 그것이었다.
 일단 1년 동안 토플 공부와 미대를 가기 위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기로 마음먹고, 영어 학원에 다니고 토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캐나다는 한국과 달리 미대를 위한 입시 미술 학원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 있는 것이 코리아 타운에 있는 한국 입시 미술 학원과 흡사한 학원이었다.

대학교에서 요구하는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서 내가 많이 착각하고 있음을 캐나다에서 미대를 다니는 친구를 통해 얘기 나누면서 많이 깨어져 갔다. 오히려 영향을 받기 싫어서 대학을 안 들어간 캐나다 친구들, 학교를 한두 학기 다니다가 그만둔 친구들을 보면서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크게 한국 미술 대학이랑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많은 고민을 한 후 순수 미술은 굳이 획일화된 교육으로 대학에서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쪽으로 마음이 흘러가고 있었다. 

결국, 난 캐나다에서 순수 미술을 가르치는 대학을 가지 않고 인테리어 디자인학과로 입학 후 졸업을 하였다.몇 가지 한국이랑 다른 점은 있었다. 한국의 쌍둥이같이 비슷비슷한 집들과 아파트가 아닌 다양한 주택들, 똑같은 길거리가 아닌, 똑같은 담이 있는 한국과는 달리 캐나다는 거의 주택에 담들이 없거나 있어도 나지막했다. 그사이로는 많은 꽃이 피어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선 높은 담으로 자기의 집이나 마당을 왜 그리 감추려 하는지 모르겠단 것을 캐나다에서 처음 느꼈다.

캐나다에선 서로 경쟁하듯 자기네 잔디밭을 가꾸고 화단을 꾸며서 이웃과 공유하고 삶을 나누고 있었다. 길을 걷다 서로 눈이 마주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hello? Good morining~” 외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많이 어색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캐나다는 이민자로 구성된 나라여서 길을 나서면 전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어서 그들의 여러 다른 문화와 언어를 접했었다. 이 다양한 새로운 문화는 내게 열린 마음의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나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아직도 주고 있는 거 같다.

대학졸업후 교수님의 도움으로 잡오퍼도 받고 이민도 신청하고, 그렇게 다년간의 캐나다 생활을 별안간 접고, 화가의 꿈은 잠시 미룬채외국계 회사의 무역부 이사로 새로운 삶을 또 시작하게 되었다. 중국, 미국, 벨기에, 태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홍콩,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접했던 다양한 문화들은 모두 나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자연스럽게 묻어나게 되었다.위  작품은 내가 전 세계를 돌면서 느껴지는 각 지역의 느낌을 색으로 표현한 6작품중 한 작품이다.

 

 

 

 

개구리, 메뚜기 그리고 꽃

지금은 해운대가 개발이 많이 되어서 고층빌딩과 아파트로 뒤덮여있지만,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면, 아침마다 동네 공터에 10여 명 모이는 구성원들이 있었다. 해뜨고 아침밥만 먹고 나면, 약속하지 않고도 어느새 다들 모여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잔인하고 징그러운 이야기지만, 하루는 메뚜기 잡으러, 하루는 개구리 잡으러 논, 밭 누비고 다녔다. 메뚜기,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다 보면, 주변에는 항상 집집이 담벼락에 핀 꽃들 그리고, 아름다운 들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백합, 양귀비꽃, 도라지 꽃, 백일홍, 채송화, 나팔꽃, 분꽃, 봉선화, 달맞이꽃, 참나리, 달개비, 호박꽃, 어수리, 맨드라미, 해바라기, 코스모스 그리고 산수국 등 그 시절 많은 꽃을 보고 식물도감 보면서 꽃 이름도 찾아보곤 했었다. 그중에서 가장 내 눈을 사로잡았던 꽃은 무성한 초록 더미 꼭대기에 흰빛, 보랏빛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산수국이었다. 바깥쪽에 있는 넓은 부분은 꽃잎도 아닌 꽃받침이기 때문에 꽃받침이 꽃잎처럼 보여서 가짜 꽃이라 불렀었다. 처음 산수국을 봤을 때는 꽃받침이 꽃잎인 줄 알았었다. 시간이 갈수록 색이 변하는 수국들은 나의 마음을 항상 평화롭고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었다.
현재에도 수국은 내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시절의 영향인지 한참이 지난 후 난 수없이 많은 해외 출장길과 여행을 가도 그 동네 꽃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어딜 가나 카메라를 메고 다니던 시절에도 항상 첫 컷은 꽃이 있던 거 같다.

컬러 TV



어린 시절 주말이면 항상 외갓집에 놀러 가는 게 일과였다. 그 이유는 컬러 TV였다. 우리 나랑 컬러 방송이 처음 나온 것은 1977년 AFKN이었고, 그 후 1980년 겨울 KBS에서 컬러 방송이 시작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외항선을 타고 외국을 다니셔서 외가댁에는 컬러 TV가 있었다. 흑백으로만 보던 화면에서 컬러로 방송이 나오니 너무나 신기했다. 특히 외국방송의 컬러방송은 해외에 나가보지 못했던 나로선 꿈을 꾸듯 엄청난 감흥이었다. 컬러로 처음 본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미국 어린이 방송인 세서미스트리트(Sesame Street)였다. 빨강, 파랑, 노랑, 녹색 그리고 보라의 원색이 방송 내내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방송하는 시간 동안 영어라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빠져들었었다. 그리고 일요일이 너무나 기다려졌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TV를 보고 나면 항상 꿈을 꿨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꿈은 흑백이라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스코틀랜드 던디 대학교의 연구진은 ‘흑백 꿈’ 이론을 반박하면서 25세 이하의 사람들은 거의 다 컬러로 꿈을 꾸었지만 어릴 때 흑백텔레비전을 보며 자란 55세 이상의 사람들은 종종 흑백으로 꿈을 꿨다고 했다. 55세 이상이면서도 어릴 때 컬러텔레비전을 보고 자란 사람의 경우엔 약 7%만 흑백으로 꿈을 꿨다고 한다. 연구진은 3~10세에 하루에 몇 시간 만이라도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면 감정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몰입하므로 의식 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고 했다. 그것이 일생을 통해 꾸는 꿈의 색깔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흑백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에는 모든 이가 컬러로 꿈을 꿨다는 증거가 있으며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어떤 사람은 꿈도 컴퓨터 화면을 보는 식으로 꾼다고 했다. 아마도 나도 그 시절 이후 부터 컬러로 꿈을 꾸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시(詩)

시(詩)

대학 시절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나서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늦게 가면 자리가 없어 공부를 맘 놓고 못하는 메뚜기를(원자리 주인이 오면 다른자리로 이동해야하는 비유)해야 했던 시절. 유화에 한참 빠져있던 시절이라 자리를 잡아놓고 미술 동아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시간을 시집과 심리 관련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심리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심리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것이 시집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목표를 세운 것이 도서관에 있는 모든 시집을 다 읽어보자는 무모한 결심이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었다. 매주 새로운 시집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느꼈다.
세상엔 참 외로운 사람들이 참 많구나. 그때부터 감성이 담긴 그림을 많이 그리기 시작하게 된 거 같다.

1991년 나의 첫 유화작품을 보는 많은 이들이
소의 눈이 슬퍼 보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난 지금도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리곤 한다.

낚시  그리고  노을

이 작품은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노을 배경과 파란 수국 두 송이다. 든든하고 안정된 환경 안에서 쭉 뻗어서 쉽게 자라나 꽃을 피우는 수국 한송이와 힘든 여건과 고난을 겪고 피어난 수국 한 송이, 겉으로 보이는 수국은 별 차이가 없지만, 이들은 과거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힘들게 피어난 저 수국은 더 크게 성장하고 있으며 어떤 시련에도 용수철처럼 다시 퉁겨져 오를 유연한 줄기를 가지고 있다. 저 줄기가 다 펴지는 날 이 수국은 엄청난 곳에 우뚝 서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낚시를 해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이었다. 해운대에서 자라서 살다 보니 바다는 항상 나의 친구였다. 야구를 해도 해운대 백사장에서 매일 모여서 했고, 축구도 모래사장에서 자주 했었다. 그러다가 4학년 때 처음으로 바다낚시를 하게 되었다. 오후부터 낚시를 시작하였는데 고기는 잡히지도 않고 해는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순간 하늘을 봤는데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고 바다도 그 색을 받아서 같이 불타 들어가는 것이었다. 고기가 낚이는 건 뒷전이 되면서 해가 수평선 뒤로 가라앉아 사라질 때까지 몇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 광경에 푹 빠져있었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나의 작품 속에 수시로 등장을 한다. 그 후 나는 거의 몇 년간 매주 주말이면 낚시하러 다녔다. 처음에는 해운대 백사장 옆 운촌이라는 가까운 방파제에 다니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어떤 장면이 연출될까 궁금해지기 시작하면서, 거의 1시간을 걸어서 가야 하는 청사포, 기장까지 걸어서 낚시하러 다녔었다. 고기를 몇 마리라도 잡은 날은 해가지고 걸어오는 길에 왜 이리 멀리 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느냐며 속으로 다음에는 너무 멀리 안 가야지 하면서, 그 다음 번에도 또 발길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 옆에는 항상 나의 낚시 친구 2살 아래 내 동생 태치가 있었다. 사실 동생은 낚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난 동생을 항상 꼬드겨서 같이 다녔었다. 혼자 다녔으면 너무나 심심하고 머나먼 길을 어린 나이에 형이 같이 가자면 묵묵히 같이 다녀준 동생에게 지금이라도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은 먼 타국에서 열심히 늦깎이 공부하고 있는 내 동생 많이 보고 싶다. 

 

팽이

어린 시절 겨울이면 자치기, 썰매타기 그리고 팽이 돌리기 등 수많은 놀이를 했었다 나의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팽이치기이다. 팽이 놀이를 하던 시절 나무팽이, 플라스틱팽이 그리고 쇠로 된 팽이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난 나무 팽이를 가장 사랑했다. 처음에 팽이치기는 그냥 돌리는 재미였다. 누가 오래 돌리나? 그리고 부딪치기를 해서 누가 오래 살아남는지의 흥밋거리였다. 그러던 중 비슷한 팽이들이 많아서 본인의 것을 알리기 위해 이름이나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겨라 승리호””나는 불사조””사자호” 등등 연필로, 볼펜으로 글씨를 쓰다가 어느 날 크레파스로 글씨를 쓰게 되었다. 돌리는 순간 신세계가 나타났다. 한색으로 처음에 이름을 썼다가 그다음에 여러 색으로 이름을 썼는데 돌아가면서 엄청난 상황을 보게 되었다. 돌아가면서 색이 혼합되어 환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후 크레파스로 팽이 위에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필요가 없었다. 가로로 줄을 그어보고 세로로 그어보고 전체를 칠해보기도 하고 점만 적어 보기도 하고 나만의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러다가 팽이 윗면을 4개로 나누고 다시 세로로 칸을 나눠서 부분마다 색을 칠을 하고 팽이를 돌리니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졌다. 그 후 나무팽이를 여러 개 사서 여러 가지 색상으로 표현하고 한꺼번에 돌려서 내 나름 멋진 작품을 만든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내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원형의 색색들은 그 시절 팽이의 돌아가는 색감에서 나온 것들이다